그렇게 예고도 없이 아버지가 나를 이 차가운 곳에 남기고 간 이후로 그 어느 사람도 나에게 사람처럼 말을 걸지를 않았다. 가끔 누가 형식적으로 안부를 물어온다면 단어들을 발음하고 내뱉는 방법을 잊어버린 것만 같아 내 목소리는 점점 작아졌다. 두 손을 모으고 중얼거리던 나의 기도는 더 이상 그 어느 군인들의 귀에도 흘러가지 않는 것 같았고 그 아무도 이를 신경쓰지 않았다.
나는 차가운 도자기 인형처럼 아무렇지 않은 척 하려고 애썼다. 아버지가 유일하게 내게 남긴 그 품위라는 허울 좋은 껍데기라도 지키려고, 그러려고 애를 쓴거 같다. 사실 나는 사람이 고팠다.
그 날 저녁 평소처럼 아무 의미 없이 형식만 남은 취전 기도를 마치고 텅빈 복도에 울리는 내 발자국 소리에 거슬려하며 돌아가던 중 누군가 나를 불렀다.
"지수님,"
내 이름을 부르는 목소리는 꽤 고위 군인에게 주어지는 개인 방에서 들려왔다. 은색 도금된 방 번호판 밑에 작게 이름이 적혀있었다. '윤정한', 최근들어는 들어본 적이 없는 이름인데...
-"부르.. 셨어요?"
남자는 발목에 부상을 입은 듯 작은 붕대를 두른 채 침대에 상체를 일으켜 앉아있었다.
"지수님, 다른 수녀님들이 찾아오는 걸 깜빡했나봐요. 혹시 대신 저를 위해 기도 드려주세요."
나를 찾는다. 드디어, 어느 누구가 내가 필요하다고 했다. 지극히 평범한 상황에서 오는 비정상적인 기대감에 손에 찬 땀으로 미끄러워지는 묵주를 고쳐잡으며 그이 침대 옆에 서 손을 모으고 눈을 감고 내가 지금 유일하게 할 수 있으면서 하고있던 그 기도 드리는 일을 했다. 그 순간 차갑고 단단한 손이 내 팔꿈치를 잡아왔다.
"너무 말랐다. 요즘 힘드신가봐요?"
-"아니에요. 저, 그럼 성부가 당신과 함께 하길 바라며 편히 주무시..."
"지수님 때문에라도 편히 못 잘 것 같아요."
-"제가, 뭐를..."
갑자기 침대에서 몸을 일으킨 정한은 절뚝거리면서도 단단한 팔로 지수의 허리를 감싸안았다. 안그래도 창백한 안색이 새하얗게 질렸고 그 여린 몸은 뜻모를 두려움 혹은 기대에 바들바들 떨렸다. 말하는 게 익숙하지 않아 달싹거리기만을 수십번을 하는 그 입술을 정한은 그대로 자신의 입술로 덮어 버렸다. 한쪽 다리로 무게중심을 잡은 터라 한쪽팔로 무너질듯 지수에게 옭어맨 듯해지만 지수는 이 예상치 못한 상황에 그를 밀어내지 못했다. 사실 그것보다 밀어낼 이유를 찾을 수가 없었다. 하나의 벽만 바라보고 자라온 지수에게 정한의 입술의 감촉은 그저 너무 새롭고도 좋은 그런 기분뿐이었다. 허리에 감겨있지 않은 다른 손으로 지수의 턱을 고쳐잡은 정한은 그 벌어진 입새로 더운 숨을 훅 불어넣었다. 지수는 자신의 몸에 들어차는 새로운 공기를 느끼며 이따라 들어온 또다른 촉감의 혀를 그저 느끼고만 있었다. 너무 좋았다. 그래서 이상했다.
-"자... 자깜만요. 우리 이러면 안돼요. 이거... 아버지한테 벌 받아요."
"나는 당신네 종교 안 믿어요. 그리고 나는 외로워 미쳐가는 그 쪽 도와주는 거에요. 불쌍히 여기는 사람 돕는거 그거 너네 철학 아냐?"
머릿 속에 아무 말도 떠오르지를 않아 손을 뒤로 둘러 나를 조여오던 하얀 사제복의 단추를 끌르는 손을 내치지 못했다. 지금까지 보았던 눈 중에 가장 순수한 욕심으로 빛나는 그 까만 눈동자를 홀린 듯 바라보다보니 바스락 거리는 소리와 함께 긴 옷가지가 내 발언저리로 툭하고 떨어졌다. 쎄한 한기에 두 팔이 저절로 어깨를 끌어안게 되었다.
계집애마냥 몸을 가린채 투명하게 반짝이는 그 눈에 홀린 정한은 그를 조심스럽게 자신이 누워있던 침대에 앉혔다. 그리고 그 앞에 무릎을 꿇고 앉아 손에 꼭 쥐어지는 발목을 잡아 도무지 돌아다니지를 않는 것을 증명하는 그 여리고 부드러운 발에 조심스레 입을 맞추다 슬며시 입안으로 가져갔다. 여태 죽은 인형처럼 굴다 이제는 자신의 입 속에 느껴지는 그 인간의 느낌에 정한은 부러 발가락 마디를 잘근잘근 씹었다. 지수는 발끝에서 느껴지는 생경한 느낌에 눈을 질끈 감고 간지럽고도 묘하게 아랫배가 당기는 기분을 만끽했다. 몸이 붕뜬 것 같았다. 정신을 차려보니 정한은 자신을 올려다보며 맨 무릎을 쥐고 있었다.
"지수야, 네가 못 느껴본 걸 느끼게 해줄게."
그 뒤로는 기억이 나는 것은 오직 감각 뿐이었다. 너무 짜릿해서, 꼭 높은 곳에서 아래로 떨어질때 그 소름이 끼치도록 좋아서...새벽에 몰래 흐트러진 옷가지를 부여잡고 내가 머무는 곳에 돌아와서도 벌어진 입가에서 실실 웃음이 흘러나왔다.
-"아버지... 죄송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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